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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지리

만주의 사람들: 한민족과 그 역사적 땅에 대한 이야기

by 지적유희@ 2024. 10. 1.

출처 : 위키피디아

만주에서 시작된 한민족의 역사

단군 할아버지의 출발점인 부여와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전략적 요지 였습니다. 하지만 후손인 우리는 이 땅을 지켜내지 못했죠. 그 결과 지금의 영토에는 만주가 포함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는 만주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조선에서 시작해, 부여고구려, 그리고 발해까지 모두 만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나라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한민족은 만주의 남쪽, 한반도에만 정착하게 된 걸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만주에 다양한 민족이 공존했던 이유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양한 민족이 살았던 만주

만주에는 농경문화 기반의 고조선과 부여고구려와 같은 정주민들 외에도 선비족오환족거란족 같은 유목민들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말갈여진 등 퉁구스계 민족들은 수렵, 농업, 유목 등 다양한 생계 방식을 가졌죠.
이러한 다양성의 원인은 만주의 지리적 특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만주는 산지, 평원, 초원, 그리고 늪지대 등 다양한 자연환경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지역입니다. 따라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환경에 따라 생활 방식을 달리하며 생존해야 했습니다.

'만주'라는 이름의 기원

'만주'라는 이름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500년이 채 안 된 용어입니다. 17세기후금을 세운 만주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이 지역을 통일하며 '만주'라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서양에서는 이 지역을 타타르라고 불렀고, 이후 서양인들이 만추리아(Manchuria)라고 부르며 '만주'라는 이름이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만주의 범위와 경계

만주의 범위는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넓게 보면 동시베리아 남쪽 끝부터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까지 포함됩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만주는 주로 중국의 동북삼성(헤이룽장성, 지린성, 랴오닝성) 지역을 말합니다.
북쪽 경계는 아무르강이며, 서쪽은 대흥안령 산맥동쪽은 우수리강이 만주와 연해주의 경계가 됩니다. 남쪽 경계는 연산산맥으로, 베이징 북부에서 요하 지역까지 이어지며, 한반도와의 경계는 주로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설정됩니다.

만주의 지리적 방어력

만주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역입니다. 연산산맥요하 하류의 늪지대대흥안령 산맥 등이 중국과의 육로 왕래를 어렵게 만들어, 역사적으로 중국의 수많은 침공을 막아낸 방어선이기도 했습니다. 반면, 만주의 북서쪽은 몽골 초원과 자연 경계가 낮아 이동이 쉬웠습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에게 유리한 통로가 되었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만주의 농업 생산력과 경제적 중요성

만주는 농업 생산력이 좋은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송화강과 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송료 대평원이 펼쳐져 있으며, 특히 헤이룽장성의 삼강 평야는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와 비교될 정도로 비옥한 토양을 자랑합니다. 이 지역은 쌀 생산지로도 유명하며, 석탄, 철광석, 유전 등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중국의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만주의 기후: 고구려가 약탈 경제를 선택한 이유

만주의 지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기후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연 강수량이 적고 기온이 낮아 안정적인 농업이 어렵기 때문에 유목과 수렵이 혼재된 경제가 발달했습니다. 고구려도 장백산맥과 같은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약탈 경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농경이 쉽지 않은 환경에서 약탈과 정복을 통해 경제적 생존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만주의 계륵 같은 위치

만주는 한민족에게 계륵 같은 지역이었습니다.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고 있었고, 농업 생산력이 일정하지 않아 지배하기 어려운 지역이었죠. 고구려 역시 만주를 직접적으로 지배하지 않고 간접 지배 형태를 취하면서 다양한 민족들과 유동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한족의 대제국들도 만주를 직접 지배하기보다는 요동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요동은 전략적 군사 요충지로, 중국과 만주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족과 유목민족 모두 요동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한반도와 요동의 관계: 왜 요동을 포기했을까?

고구려는 요동을 장악했지만, 그 후 발해와 고려는 요동으로 진출하려다 유목민족의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고려 말기 공민왕이 요동 정벌을 시도했으나, 명나라가 강성해지기도 하였고 출정한 군대의 군량도 부족해져 결국 실패했고, 결국 1388년 이성계의 회군으로 요동 정벌은 무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압록강을 국경선으로 삼게 되었고, 이후 요동을 포기하게 된 역사적 흐름이 이어졌습니다.

지정학의 변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과거 유목민족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반도는 18세기 이후 유목민족의 소멸로 인해 지정학적 역할이 변화했습니다. 한반도는 더 이상 유목민들의 위협을 받지 않았고, 대신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 간의 균형자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 전쟁으로 청나라가 몰락하면서, 한반도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사이에서 새로운 지정학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새로운 지정학적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지정학적 균형자 역할을 잃고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되는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현재의 한반도는 여전히 대륙과 해양 세력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냉전 시기에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탈냉전 시기에는 중국을 지렛대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며,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신냉전 시대에는 한국이 다시 한번 지정학적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변동 속에서 한국은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한민족의 정체성과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균형자 역할을 다시금 찾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입니다.